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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결백하고 참교육을 실천하신 교육행정가-- 청백교직자 두진열 선생

by 행복누리 2022. 2. 4.

청렴결백하고 참교육을 실천하신 교육행정가--청백교직자 두진열 선생

가을풍경: 출처 다음이미지

 

청렴결백하고 참교육을 실천하신 교육행정가


고정곤
(전 전북도교육청 초등교육과장, 서해대학 겸임교수)

두진열 교장님 회고록 발간에 즈음하여 생전의 두 교장님 교육철학과 성품에 대해 내 머릿속에 각인된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글을 접하는 자녀들을 비롯한 가족 친지 그리고 교직에 봉직하는 많은 후배 선생님에게 교육자로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올바른 길인가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용기 내어 이 글을 쓴다.

<두 교장님의 나에 대한 신뢰는 나의 교직(敎職) 성장의 밑 걸음>
내가 두진열 교장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47년 전 군산국민학교가 문교부 지정 반공도덕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연구부장으로 발탁되면서 부터이다. 나는 구암국민학교에서 연구부장으로 시 지정 자연과 시범학교 공개발표회를 성공리에 수행하고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교육부지정 시범학교 연구부장으로 발탁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 시기에 연구부장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소신껏 일을 했고, 또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음은 물론, 나 자신의 교직(敎職)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두 교장님은 나의 연구적 소양과 능력을 완전히 신뢰함으로써 한 번도 연구과제 수행에 대한 지시나 조언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러나 연구업무 수행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 주는데 크게 배려하였다. 학생 수 비해 교실이 턱 없이 부족한 열악한 학교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8평 정도 연구실을 마련해주고 거기다가 필경사까지 배정하여 주어 연구과제 해결을 위한 기획 업무에 전념할 수 있었다. 또한 군산국민학교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선배들이지만 후배 연구부장인 필자가 기획 추진하는 모든 업무에 절대적으로 협조하고 참여해주어 시범학교 업무 추진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나는 이와 같이 서로 협조하고 지지해주는 연구 분위기가 어떻게 해서 조성된 것일까 하고 가끔 생각해 보았다. 두 교장님은 업무 수행과정에서 직원들에게 지시나 강요가 없었다. 그러나 두 교장님은 교장으로서 자신이 맡은 일에 솔선수범하는 진지한 자세로 일함으로써 모든 직원들에게 귀감이 되어 직원 각자 스스로 일하는 업무 분위기가 조성된 것으로 본다. 나는 그 후 시범학교 운영 과정에서 훈련을 통해 탐색한 이론과 개발된 자료를 정리하여 서울 교단사에서 도덕교육의 이론과 실제의 저서를 발간하였다. 이것은 두 교장님이 연구부장인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나로 하여금 연구에 전념하도록 배려한 결과로 인식되면서 두 교장님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다.
우리 교사는 자신을 믿어주고 신뢰하고 인정해주는 상사에게 헌신적인 봉사의 열정을 쏟는다. 두 교장님은 이렇게 직원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끄는 리더쉽을 몸소 실천한 교육행정가로 인식된다.

<관료성이 없고 동지, 동료적인 교육행정가>
두 교장님은 전문직에 오랫동안 근무 하여 관료성이 강할 법도 하지만 예상외로 서민적이며 동료 직원들 간에는 수평적인 인간관계 유지에 노력하셨다. 관료적 행정가 의 대표적 행동특성은 아랫사람들에게 대접과 우대 받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두 교장님은 아래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는 전문직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지만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번은 문교부지정 반공 도덕 시범학교 부산 토성국민학교 연구발표회 두 교장님과 연구주임 내가 초청되어 같이 부산에 출장 다녀오게 되었다. 그런데 부산 토성 국민학교 공개 발표회 과정에 교장선생님이 우리 학교 연구내용을 소개하는 특강을 하셔서 학교 측으로부터 특강료를 받았고 그 특강료 일부를 떼어 나에게 주셨다. 그것은 특강자료 작성에 연구주임인 내가 도와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되었으나 나는 끝까지 사양하고 받지 않은 적이 있다. 그리고 출장 중에 쓰여진 경비 절반을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두교장님이 부담하였다. 지금도 직원에게 대접이나 우대받기 거부하는 동지적이며 동료적이고 소탈한 성품을 가지신 교육행정가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형식적, 전시적인 거짓교육을 거부하는 참 교장상>
두 교장님은 형식적 전시적이며 보이기 위한 거짓교육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교육행정가 이시다. 두 교장님 재임시 전국규모의 교육부지정 반공, 도덕 시범학교 공개 발표회를 개최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학교 시설, 설비가 너무 노후 되어 개, 보수해야할 시설, 설비가 많았으나 이에 따른 소요예산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연구, 시범학교 공개발표회에서는 연구의 본질적인 내용의 공개는 뒷전이고 잘 꾸며진 학교 시설, 설비나 조경에 더욱 치중하여 잘 가꾸어진 새 학교 공개에 더욱 정성을 쏟는 기형적인 추세이었다. 때문에 많은 연구, 시범학교에서는 고쳐야 할 부분을 그대로 두고 페인트로 미장을 처리하여 전시효과를 노리는 사례가 허다하였다. 그러나 두 교장님은 이러한 전시적 형식적인 면을 보이기 위한 거짓교육을 줄곧 부정하셨다. 파손된 시설, 설비는 반드시 완전하게 근본적으로 개 보수해야 한다는 시설, 설비 관리 철학으로 눈가림식 성과 위주 전시행정을 철저히 배제하신 분이다. 이는 오늘날 학교 교육뿐만이 아니라 많은 행정 분야에서 본질적이고 장기적인 시각을 벗어나 일시적이며 전시적인 행정으로 종국적으로는 예산 낭비만을 자초하는 행정가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참된 학교 행정을 실천한 분이셨다.

<학교를 내 가정처럼 사랑하는 ‘학교애(學校愛)’가 강한 교육자상>
학교행정가가 학교행정을 펼치는데 있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생각은 학교를 내 가정처럼 여기는 ‘학교애’가 있어야 한다. 인사규정에 의거 일정기간 근무하다가 정해진 기간 지나면 떠나게 된다는 생각으로 학교 경영의 행정가에게 ‘학교애’가 별로 없다.

두 교장님은 전임 교장으로부터 너무 많은 부채를 인계받아 학교부채를 갚으려고 고민하다 보면 밤잠 설칠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는 학교 예산이 영세하여 대부분의 학교가 학교를 경영하다보면 액수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학교 부채가 있기 마련이고 신, 구 교장 간 사무인수인계 과정에서 부채 때문에 신, 구 교장 간에 잦은 갈등을 겪었다. 오늘날 모든 공직사회에서는 예산집행 상황을 주기적이며 전 방위적으로 감사가 부단히 이루어 투명한 예산 집행으로 학교부채가 있을 수 없지만, 그 시절에는 상황이 달랐다. 결국 두 교장님은 학교 부채를 내 가정 이끌어가는 마음으로 부채 청산에 심혈을 기울여 회현국민학교로 가실 때는 다음 교장에게 부채를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교장은 전임교장한테 인계받은 액수만큼의 부채 남겨놓고 학교 예산을 자유롭게 운영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회현국민학교 재임 때는 학교 창고 구멍 난 것을 보고 집에서 판자조각을 출근길에 자전거에 싣고 부서진 곳을 보수했다는 일화는 학교를 정말로 내 집처럼 ‘학교애’를 가지고 경영한 소박하고 청렴결백한 교장 상을 실천한 분이셨다.
내가 교직생활을 영위하면서 만난 여러분 교장선생님의 학교 경영모습을 되돌아보면 각자 나름대로 교육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학교 여건에 따라 학교를 특색 있게 운영해 오셨지만 두진열 교장님은 유독 청렴결백하고 성실하고 진실 된 참교육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학교행정가로 알고 있다. 2년여의 짧은 기간이지만 50여 년 전의 두 교장님과의 생전의 희미한 추억을 되살려 보려하니 나 또한 40여 간의 갖가지 애환과 희비로 점철된 교직생활의 긴 터널을 지나 자유의 몸이 된지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지나온 나의 교직생활에 두 교장님 철학과 소신들이 함께 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올라 늦게나마 고인에게 감사드린다.
다시 두진열 교장님의 회고록 발간을 기획하신 자제분들의 부모를 기리는 남다른 효심에 찬사를 보내면서 필자의 글이 고인의 생전 모습을 제대로 읽고 보지 못하여 누가되지 않았으면 한다. 두진열 교장선생님 감사합니다.
(2017.4.23)

 

 청담 두진열(杜鎭烈)

 

두진열(杜鎭烈): 19211984: 두릉인(杜陵人), 1921년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 천성(天性)이 근면독실(勤勉篤實)하고 호학역행(好學力行)하여, 교원검정고시(敎員檢定考試)에 합격하여 다년간(多年間) 교육계에 종사(從事)한 청백(淸白)교직자이다. 옥구군교육청(沃溝郡敎育廳) 장학사와 전라북도교육위원회 장학관을 역임하고 오산(五山),군산(群山), 회현(澮縣)국민학교 교장으로 근무(勤務)하였으며, 1984년에 작고(作故)하였다.

옥구군지(沃溝郡誌) (옥구군, 199011월 발행)

 

두진열(杜鎭烈): 19211984: 현대의 교육자, 일명(一名) 창만(鋹萬), 자는 권호(權豪), 호는 초계(草溪) 또는 청담(靑潭), 본관은 두릉(杜陵),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근면 독실하고 호학 역행 하였으며, 교원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다년간 교육계에 종사한 청백(淸白)교직자이다. 옥구군 교육청장학사, 전라북도 장학관과 오산(五山),군산(群山), 회현(澮縣)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청백교육자로 전북교육에 헌신하였다.

옥구인물지(沃溝人物誌) (옥구문화원, 199111월 발행)

 

두진열(杜鎭烈): 19211984: 현대의 교육자, 일명(一名) 창만(鋹萬), 자는 권호(權豪), 호는 초계(草溪) 또는 청담(靑潭), 본관은 두릉(杜陵),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 평장사(平章事) 경승(景升)의 후손, 용균(用均)의 아들이다. 천성이 근면 독실하고 호학 역행 하여 교원검정고시(敎員檢定考試)에 합격하여 다년간 교육계에 종사한 청백(淸白)교직자이다. 옥구군 교육청장학사, 전라북도 장학관과 오산(五山), 군산(群山), 회현(澮縣)국민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대학교 전라문 연구소, 1990년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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