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앞길을 열어준 청담(靑潭) 두진열 형님을 회고(回顧)하며
나의 앞길을 열어준 청담(靑潭) 두진열 형님을 회고(回顧)하며
두 창 모
(전 옥구군 교육장)
청렴하고 올곧은 교직자이셨던 청담(靑潭) 두진열 형님의 생애(生涯)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장남 하영 조카(전북과학대학교 교수)가 회고록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형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을 말할 기회라 생각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가 가장 숭배하고 존경하며 나의 인생 길잡이가 되어주신 형님의 어린시절 보고 듣고 가르침을 주신 것에 대해 회고 하니 지난날 형님과 추억으로 인해 만감이 교차한다.
◌ 유년시절과 교원시험 합격
일제 강점기 한학을 공부 하시고 서당에서 학동을 가르쳤던 큰아버님 슬하의 가난한 농촌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시어 당시 회현면에 학교가 없어 6Km 떨어진 옥산보통학교에 어렵게 걸어 다니면서 면학에 힘쓰셨고, 4년 졸업 후 옥구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교사의 꿈을 가지고 가사 도우면서 주경야독으로 틈틈이 공부하여 20세 1940년 9월 소학교 3종 교원시험에 합격하였다. 교원시험에 합격하기까지 형님이 독학(獨學)으로 공부한 과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정도로 열정과 집념 연속이었다고 생각한다. 새끼 꼬는 등 가사 일 도우면서 종이에 풍금건반 만들어 놓고 오른손으로 짚으면서 입으로 노래 부르는 광경을 여러 번 본적이 있고 직접 농사에 똥거름 지게 지는 것은 일상생활 모습이었고 논에서 지게지고 일하며 쉬는 시간 틈틈이 책을 들고 공부했다고 들었다. 한편 고단하고 극히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동생들과 주위 친구들에게는 항상 희망과 함께 좋은 이야기 들려주고 즐겁게 생활하시던 모습은 잊지 못할 추억의 단편들이다. 형님은 조부모님 숙부님들의 가르침과 말씀에는 다른 의견 없이 순종해 실행하셨다. 이러한 태도를 보아온 우리도 형님을 본받아 생활모습 이어오고 있다. 형님이 교원시험에 합격하였을 때 소식을 들은 집안가족은 물론 월평마을, 원당마을 그리고 회현면 내 친지들의 기쁨과 격려말씀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 초임발령과 교사시절
1940년 10월 임실삼계심상소학교 훈도(訓導)로 부임하셨고 재직하며 전주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 하셨다. 틈틈이 시간 내어 조모(祖母) 부모(父母) 숙부모(叔父母)들을 모시고 근처 관광지 관람과(남원중심) 유명지 관광을 하시는 등 부모님과 집안어른에게 공경심(恭敬心)과 효성(孝誠)이 지극하셨던 분이셨고 형제자매들도 사랑과 관심, 우애심이 많아 서로 화목(和睦)하였다.
1944년 3월 사촌동생 창규(鋹圭)를 6학년으로 재수시켜 전주농업학교에 입학시켰으며 1945년 4월 필자 전주농업학교 합격소식 듣고 국방색 양복 (반윗소매, 반바지) 1벌을 합격축하 말씀과 함께 보내 주셨는데 필자에게 처음 입어보는 양복이었다. 1945년 해방 후 옥구로 이동하여 회현국민학교 훈도로 발령받고 1949년 용화분교장(分校長), 1951년 11월 문창국교 교감으로 근무하셨다.
◌ 장학사 및 장학관 시절
옥구군 교육청 장학사 시절 형님은 근무태도 확립은 물론 상사, 동료들과 유대관계가 돈독(敦篤) 하였고 특히 친목에 주력하여 주위 분들의 칭송을 많이 받았고 사무 처리와 장학 지도 때는 권위적이 아니고 집단협의체 도입과 타학교 장학지도시 우수사례를 “학교실정에 알맞게 계획 세워 교육현장에 옮겼으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소개하면서 학교운영에 참작하여 달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일선 학교장과 교직원들의 호감을 많이 받았고 출퇴근은 군산에서 12km 떨어진 회현에서 당시 도로가 포장되지 않고 흙, 자갈 길이고, 눈비, 세찬바람, 악천후라도 한 번도 결근하지 않았고 간혹 면단위 장학지도 출장 시 주위사람들이 택시를 불러 목적지까지 모신다고 해도 극구 사양하고 바로 회현 집으로 가셨던 근면성실하고 청렴한 교직자였다.
교육청직원 혹은 다른 사람들과 회식이 있을 때 동료직원의 여러 번 만류에도 계산은 먼저 형님이 하셨던 관료의식이 없으시고 동지애가 강한 성실한 분이셨다. 휴일 때도 집안일은 물론 논밭에서 작업하고 지게 짐은 물론 1km거리 논에 똥거름을 지게로 나르고 꼴 추고, 풀 뽑고, 늦게 집에 귀가했다. 이런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은“ 진열이는 공무원봉급 가지고도 충분한 생활을 할 텐데 살지만 알지 죽는지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수근 거렸다한다.” 이런 근면 성실한 태도는 어렵던 유년시절 길러진 생활습관으로 사료된다.
간혹 동료직원들과 친구 모임이 있을시 형수님이 동행하는 경우가 있었다. 형수님은 농촌에서 농사에만 종사하셔서 나들이에 익숙지 못하여 식당이나 찻집 등을 다녀본 경험이 적어 형님이 먼저 직접 음식 다루는 시범을 보이셨다. 형수님의 실수를 카바하기 위해서였고, 어색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다. 그토록 매사에 세심하고 자상하신 분이셨다. “교육은 말로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 형님은 가르친 것 뿐 아니라 교직자 모범 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회고한다.
1961년 5월 전라북도 문교사회국 학무과 장학관으로 발령받았다. 형님은 다른 장학사들이 기피하는 변두리 무주, 금산, 장수, 진안 장학지도는 형님이 주로 맡았다. 전주여관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출퇴근하셨고 아침 일찍 출근하여 저녁 늦게까지 근무하며 퇴근하는 생활이 계속되었고 따라서 면회 가면 업무에 바빠서 상면할 기회가 별로 없었으며 항상 집안걱정을 많이 하셨다.
◌ 오산, 회현, 군산국민학교 교장시절
1962년 5월 익산 오산국민학교장으로 발령받아 학생교육과 교직원 융화 단결에 힘쓰시고 학교운영, 교수방법 개선연수 등을 개최하여 학교운영을 쇄신하고 시범학교운영으로 교육감표창, 학부모 동창회에서 금반지 한 점 증정한 것은 오산국교 개교 이래 처음 있는 행사이며 감사장도 받았다.
1964년 3월 회현국민학교장으로 부임하여 당시 선진학습방법인 프로그램 학습법을 도입하여 학생실력향상 및 교육내실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노력하셨고 운동장 확장, 학교주위 환경정화 등 고향발전과 학교발전에 최선을 다하셨다.
1969년 3월에 군산국민학교장으로 발탁되어 교직원으로부터 존경 받았다. 그중에 일부직원들이 떠난 전임교장에게 아부하던 5~6명이 교장인수인계에 간섭하기 시작하니 형님께서는 “자네들이 관여할일이 아니 네” 하시며 퇴장시키었다. 내용은 인수인계에 채무관계가 복잡하고 너무 많이 받으면 반환(상환) 방법이 없어 못 받겠다는 것” 그 후 이자들이 학교운영 전반에 불평을 하기 시작하여 직원들의 동행을 요청하는 실정이었다. 직원들은 부동 상태이었으며, 결국에는 형님의 노선이 승리하였다. 그런 가운데도 문교부지정 연구학교로 지정받고, 당시 형님을 직간접적으로 도운 “문희옥 선생님과 다음해 고정곤 선생님” 주관하여 연구발표를 성공리에 마쳤다. 이에 문교부장학관, 도교육위원회 장학관들이 합치된 찬사와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 후 도시학교에 회의를 느끼고 고향에 가서 후배들을 양성하는 교직생활 할 것을 다짐하여 1971년 다시 회현국민학교로 희망하여 부임하였다. 고향 학교발전 학생교육에 전념하시었으며 옥구교육청 연구학교 지정받고 활발한 학교 경영을 하였다. 가끔은 직원들의 불평과 고됨을 호소하여 왔다.
1977년 2월 학교일로 피로에 건강이 악화되어 지병이 되고 그로 인하여 명예퇴직 하셨고 형수님 보살핌과 형제들 지방 유지들 도움 받으며 생활하셨고 특히 이창세씨 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8년 동안 투병 하시다가 1984년 12월 하직하셨다.
◌ 나의 앞길을 열어 주신 형님
필자가 군산사범학교 합격 및 입학 시 형님의 고마운 가르침을 잊을 수 없다. “항상 공부할 기회가 있는 것 아니다. 공부할 때 열심히 하고 후회 없이 하라” 말씀 하시면서 사범학교 재학 중 격려와 공부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셨다. 형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졸업하고 교직에 첫발을 내딛고 사회생활 시작할 때 교직생활 마칠 때까지 무사고로 끝났으니 형님에 대한 고마움 잊을 수 없다.
형님께서는 교직생활 하실 때 상사, 동료들의 유대관계가 원만 하셨고, 귀여움을 받아왔기 때문에 나의 발령과 근무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필자가 졸업 후에 발령을 염려하시고 형님이 직접 전북도 학무국 초등교육계 “김창규 장학사”에게 부탁하여 52년 2월 첫 발령을 받게 되었으며, 발령장을 받을 때 도학무국 김창규 장학사님에게 인사하라 하여 부탁함을 알았다. 그 당시는 6⋅25 전쟁 중이라 모든 일이 “빽”(배경)으로 통하고 “돈”으로 통하였던 사회현상이었다. 발령장 받은 후 “김창규 장학사님” 말씀에 “학교 부임하면 학교장이 물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본인의 명암 한 장을 주셨다.
1952. 2. 29. 첫 학교 부임하기 위해 군산중앙국민학교 교무실에 가서 교감선생님에게 인사와 함께 발령을 신고하였고 교장실로 교장선생님에게 발령인사를 하였다. 김창규 도장학사님께서 예측한대로 권정식 교장선생님이 묻는 말씀은 “누구의 “빽”으로 우리학교에 발령 받았느냐?”라고 물으시기에 김창규 장학사님의 명암을 드렸더니 받아보시고 웃으시며 “두군 근무 잘해”하고 격려말씀을 하셨다. 그 후 알고 보니 김장학사님이 군산시를 담당하였다. 그 후 여러 학교 근무 때 교장, 교감 등 여러 선생님의 귀여움 받고 생활하였으며, 이는 청담 두진열 형님의 염려 덕으로 생각한다. 개정국교(6년10개월), 군산국교(1년8개월), 군산중앙국교(7년), 금광국교(4년6개월), 문화국교(9개월), 교감 승진하여 군산동국교 (4년), 군산교육청 장학사(5년), 전주교대 부속초 교감(6년2개월), 군산풍문 교감(6개월), 교장으로 승진하여 정읍 신풍국교 (3년6개월), 그 후 교육장으로 승진 옥구교육청(3년6개월) 나운국교장(1년6개월)을 끝으로 국민포장 “동백장(증14054호)”받고, 1994년 8월31일에 정년퇴임하였다.
이상과 같은 필자가 교직생활을 무리 없이 성공리에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형님의 가르침 및 보살핌과 적극적으로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하며 모든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고 편안한 생활되시기를 언제나 빌고 있습니다. 끝으로 두서없고 깊이 없이 나열된 글을 보고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말씀 드립니다. 형님 생전생활과 나의 앞길 열어주신 형님을 기리면서 다섯 번째 동생 창모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5.2.>
청담 두진열(杜鎭烈)
○ 두릉인(杜陵人), 1921년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 천성(天性)이 근면독실(勤勉篤實)하고 호학역행(好學力行)하여, 교원검정고시(敎員檢定考試)에 합격하여 다년간(多年間) 교육계에 종사(從事)한 청백(淸白)교직자이다. 옥구군교육청(沃溝郡敎育廳) 장학사와 전라북도교육위원회 장학관을 역임하고 오산(五山),군산(群山), 회현(澮縣)국민학교 교장으로 근무(勤務)하였으며, 1984년에 작고(作故)하였다.
○『옥구군지(沃溝郡誌)』 (옥구군, 1990년 11월 발행)
○현대의 교육자, 일명(一名) 창만(鋹萬), 자는 권호(權豪), 호는 초계(草溪) 또는 청담(靑潭), 본관은 두릉(杜陵),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근면 독실하고 호학 역행 하였으며, 교원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다년간 교육계에 종사한 청백(淸白)교직자이다. 옥구군 교육청장학사, 전라북도 장학관과 오산(五山),군산(群山), 회현(澮縣)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청백교육자로 전북교육에 헌신하였다.
『옥구인물지(沃溝人物誌)』 (옥구문화원, 1991년 11월 발행)
○ 현대의 교육자, 일명(一名) 창만(鋹萬), 자는 권호(權豪), 호는 초계(草溪) 또는 청담(靑潭), 본관은 두릉(杜陵),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 평장사(平章事) 경승(景升)의 후손, 용균(用均)의 아들이다. 천성이 근면 독실하고 호학 역행 하여 교원검정고시(敎員檢定考試)에 합격하여 다년간 교육계에 종사한 청백(淸白)교직자이다. 옥구군 교육청장학사, 전라북도 장학관과 오산(五山), 군산(群山), 회현(澮縣)국민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 (전북대학교 전라문 연구소, 1990년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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