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유학자이자 문인 묵와거사(黙窩居士) 두재표(杜宰杓) 가장(家狀)과 시해집
□ 묵와거사(黙窩居士) 두재표(杜宰杓) 가장(家狀)
묵와거사(黙窩居士)두재표(杜宰杓) 가장(家狀)
부군(府君)의 성은 두릉두씨(杜陵杜氏)요, 처음이름(初諱)은 진계(晋桂), 자(字)는 명수(明秀)였으나 성장해서 재표(宰杓)로 고쳐 불렸다. 처음의 호(號)를 시해((詩海)라고 하였고 또 초만(草晩)이고 묵와거사(黙窩居士) 라고도 하였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문하생(門下生)이었다.
송나라 진종(眞宗) 함평연간(咸平年間) 병부상서 휘(諱) 경령(景寧)공은 충직하게 직언극간(直言極諫) 하여 진종의 의사에 거스리게 되어 중서사인(中書舍人) 지건(之建) 우습유(右拾遺) 지방(之逄) 거느리고 고려국 궁지현(宮池縣) 현금(現今) 만경현(萬頃縣)에 도착하여 고려 조정(朝廷)에서 특별히 만경현을 식읍지로 사패(賜牌)하고 또한 두릉군(杜陵君)에 봉하였다. 그분이 우리나라 두씨 시조(始祖)이시다.
두방(杜邦) 공은 문하시랑(門下侍郞)벼슬 하였고, 평장사(平章事) 및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신 두경승(杜景升) 공은 서경(西京,평양)을 평정하여 벽상공신(壁上功臣)에 봉하여졌다. 근세조선(近世朝鮮)에 와서는 두승손(杜承孫) 공이 병마우후(兵馬虞候)을 역임하셨으며, 만경(萬頃)에서 옥구현 옥산(玉山)으로 이주하여 세거(世居)하였다.
두세준(杜世준) 공은 효성이 지극해 조정에서 효자 정려(旌閭) 세우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두헌(杜憲) 공은 공훈(功勳)있어 선무랑(宣務郎:문관 종6품 관직)에 임명되었고, 장수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에 올랐다. 두사순(杜思順) 공은 현감을 역임하셨다. 두정란(杜廷蘭)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 지킴에 충정을 다하였으며,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가하여 순절함으로써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봉하여졌으며 금곡사 및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지금까지는 11세 이상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여량(杜汝良) 공과 두인휘(杜仁揮) 공은 문장(文章)으로 글을 잘 써서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두석무(杜碩茂) 공은 효도로써 유명하여 회현면 금광리 원당(元堂)에 정려문이 세워져 있다. 두우응(杜友膺) 공 두문수(杜文守) 공 두상효(杜尙孝) 공 두원식 (杜元植)공 두필규(杜必奎) 공은 효도와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두홍하(杜洪夏) 공은 참봉 지낸 후 통정대부에 봉하여 졌다.
부군(府君) 어머님은 제주고씨 이며. 고대량(高大樑) 공이 외갓집 큰 할아버지이시다. 부군(府君)께서는 철종조(哲宗朝) 경신(庚申)년 3월15일 태어났고 고종(高宗) 갑신(甲申)년 3월 9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享年) 45세이었다. 묘소는 정읍군 소성면 고교리 연동(蓮洞) 뒷산 기슭 114번지 간좌(艮坐)에 있다. 원래 비문(碑文)이 있었고, 배(配)는 전의이씨 이경회 공 여식(女息)이며, 묘소는 성산면 오성산(五聖山) 남쪽 산기슭 계좌(癸坐)에 있다. 또 부인은 진주강씨이며 강방(姜芳)공의 여식(女息)으로 묘는 회현면 금광리 원당 뒷산기슭에 있다. 남보다 뛰어나게 영리하고 형제(兄弟) 사이에 우애(友愛)가 돈독하여 집안이 화목하였다. 어린나이에 열성(熱誠)으로 학문을 닦았으며, 문장(文章)을 일찍이 성취하였다. 슬하에 삼남 삼녀을 두었으며, 장남 병구(炳九)는 선산김씨(善山金氏) 김양률(金陽律) 여식과 결혼하였고, 차남 병근(炳根)은 담양전씨(潭陽田氏) 전준기(田畯基)여식과 결혼하였으며 삼남 병민(炳敏)은 제주고씨 고종섭 (高宗燮)여식과 결혼하였으며 세 명의 사위(壻)는 진주강씨(晉州姜氏) 강태기(姜泰基), 제주고씨(濟州高氏) 고남진(高南鎭), 진주강씨(晉州姜氏) 강왕성(姜王成)이다.
장남(長男) 병구(炳九) 아들은 승균(升均), 차남(次男) 병근(炳根) 아들은 태균(泰均) 용균(用均) 정균(正均), 백균(白均), 옥균(玉均)이고, 삼남(三男) 병민(炳敏) 아들은 일균 (日均) 행균(幸均) 완균(完均)이다. 그 외 모두 기록하지 못하였다.
오호라! 부군(府君)께서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되었다. 아름다운 행적과 자랑스러운 업적이 세월이 오래되어 자세히 기록할 수 없다. 다만 어른들의 구전(口傳)으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지하여 이렇게 간단히 기록해두는 것이다. 보충할 것이 있다면 훗날을 기다려 더 자세히 기록함은 군자가 취할 도리일 것이다.
<불초손(不肖孫) 용균(用均) 謹識>
<출처> 『시해집』 두재표 원저 두용균 편저 1966
『국역시해집』 두재표 원저, 정훈 유종국 역 2018.
시해집[ 詩海集 ]
정의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학자 두재표(杜宰杓: 일명 두진계(杜晉桂))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66년에 간행한 시문집.
내용
2권 2책. 석인본. 1966년 두용균(杜用均)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전준기(田峻基)의 서문과 권말에 최온(崔榲)·용균의 발문이 있다.권1에 시 223수, 권2에 서(書) 1편, 서(序) 4편, 기(記) 2편, 잡저 7편, 표(表) 9편, 책문(策文) 23편, 부록으로 가장(家狀) 1편, 묘갈명 1편, 서(序) 5편, 사(詞) 6편, 문(文) 1편 등으로 수록되어 있다. 『시해집』의 부록 뒤에는 아들인 두병민(杜炳敏)의 글을 모은 『소계유고(小溪遺稿)』 1권이 부기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시상이 고매하고 시체가 유연하다. 특히 <제백로(題白鷺)> 10수는 칠언절구로서 뛰어난 시이다. 서(書)의 <면학서(勉學書)>에서는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잡저의 <처인택거론(處仁擇居論)>에서는 사람은 올바른 장소를 가려서 살아야 함을 강조,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예를 들어 논술하였다.
책문은 주로 학문에 관한 것으로서, ≪맹자≫와 ≪주역≫에 대한 문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표의 <흥학교양유생( 興學校養儒生)>에서는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오서오경을 닦았고 선조 때나 정조조에서는 윤강(輪講)의 제도를 사용하였으니, 성균관에서도 이것을 시행하라는 내용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시해집 [詩海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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